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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양천 살리기

     서울 목동에 이사온지 만 10년이 되었다.  2001년경부터 주말에 아이들과 자전거로 가까운 안양천을 거쳐 한강으로 가보곤 하였다.  안양천변은 오랫동안 인간에게 버림받았기에 인간의 손을 타지 않아 자연미를 갖추어 콘크리트로 화장한 한강보다는 훨씬 더 아름다웠고, 정이 더 갔다.
    
    

 

     

       위 사진들은 2002년에 찍은 것들이다. 그 때에는 풍경 사진만 찍고 재빨리 한강으로 가야 했다.  7-80년대의 짙은 포도주 빛 하천은 아니었지만 역한 냄새와 떠다니는 각종 오물 때문에 잠시 있기도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천 수질 등급은 BOD, COD, 수소이온농도, 부유물질, 용존산소량 등 여러가지를 따져서 결정하는데, 최하등급인 6등급 이하는  BOD 10 이상, COD 11이상이다.

      1998년도 안양천 중상류 수질이 BOD 41.6 / COD 29.2였으니, 6등급 '하천'이라고 말할 수도 없는 그냥 '하수도'였다.             

        '안양천 살리기' 사업은 2001년부터 시작되어 소하천수와 하수를 구분하는 분류벽(분류관로)을 만들어 소하천수는 그대로 두고, 하수를 하수처리장으로 보내어 처리한 후에 하천으로 배출하고, 지하철역에서 발생하는 용출수를 보내어 수량을 추가 확보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2005년 경까지도 홍수 후에 안양천 하류에 나가보면 홍수에 희석된 하천으로 멋모르고 올라온 물고기들의 떼죽음을 자주 목격할 수 있었다.    

         안양천 살리기의 효과로 안양천 상류의 수질은 2005년경부터 극적으로 개선되기 시작하였다. 안양천 상류의 2005년도 수질은 BOD3.2/ COD6.5로 3급수로 대폭 개선되니 하수 그 자체였던 7년전과 비교하면 그야 말로 환골탈퇴의 경지였다.

         이 때쯤부터 안양천 하류의 역한 냄새도 점차 사라지기 시작하고  2008. 1. 부천 역곡 하수처리장이 준공되면서 안양천 하류도 곧바로 4등급 하천이 되었다.

     그럼, 지난 10년 동안에 안양천 하류에서 어떤 수질개선 사업이 있었나? 지하철 문래역 용출수를 안양천으로 공급(전체 유량의 극히 일부임)하기 시작한 이외에는 없다. 
    거의 손을 대지 않아도 하류의 물이 맑아진 이유는 지천마다 하수처리장이 들어서서 
상류의 수질이 개선되자, 하류가 저절로 맑아졌던 것이다.

   오니가 두껍게 쌓여있던 바닥도 표층은 계속 흘러 들어오는 맑은 물에 의하여 씻겨 바닥은 깨끗해졌다. 물론 하천 밑바닥의 오니층은 아직도 그대로 있을 것이다. 
  지금은 보도에 나오다시피 한강에서 올라온 팔뚝만한 물고기들이 안양천 하류에 바글거리고, 그곳에 알도 낳고 있다. 철새는 한강보다 오히려 더 많다고 할 수 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지난 10년간 안양천의 변화만 하여도 너무나 고마운 일이다. 
 
 2, 3년 전부터 콘크리트로 둘러친 한강까지 가는 일은 거의 없고, 안양천변 잔디밭에서 아이들과 축구나 야구를 하면서 논다.     

  이 정부는 보를 쌓고, 바닥을 준설하는 사업에 "4대강 살리기"라고 이름을 붙였다. 
  강을 그렇게 살리고 싶은가? 
  그렇다면 '안양천 살리기' 현장에 가서 모범을 배워라.
  보를 쌓고 바닥을 준설하여 안양천을 살리고 있는가? 
  안양천 하류 바닥은 긁어내지 않고 그대로 두었지만 상류가 맑아지자 표층의 오니가 씻겨가자 금새 하천으로서의 기능을 회복하고 있는 중이다.       

 '4대강 사업'이 잘못된 것이면 후대에 바로 잡으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중에 보를 헌다고 강의 자정 및 생명 보호 기능이 저절로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준설 전처럼 자갈, 모래, 토사가 퇴적되어야 비로소 정화 기능이 회복될 터인데, 자연의 정화조가 다시 갖추어지는데 걸리는 시일이 얼마나 될 지는 짐작조차 하기 어렵다. 

    2. 단식일기  

   농성 텐트 바로 앞에 부천시 청소년 연합축제 무대가 설치되어 오후 2시부터 밤 9시까지 진행되었다. 덕분에 심심하지 않았지만 커다란 음향이 방문자와의 대화를 자주 중단시켰다.  하루 종일 오락가락 하는 빗속에서 우비를 입고 춤추는 청소년들이 든든하게만 보였다. 비 때문에 8개월간 야심차게 축제를 준비한 분들의 어려움이 매우 컸을 것이다.  
   오전 내내 새길교회 '나무' 목사님이 같이 계셔 주어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후에는 가톨릭 정의구현사제단의 산 역사인 호인수 신부님(고강동 성당)과 서현성님이 찾아주셨다. 
   릴레이 단식에 같이 참여하는
이택규 목사님과 윤병국 시의원, 김기현 부천Y총장, 이강인 국제와이즈멘 인천지방 증경총재 등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도 찾아와 격려하여 주었다. 
  여고생들 10여명이 찾아 왔는데, 청소년 기자단이라고 하여 다소 긴장(?)했지만, 학생들이 너무 호의적인지라 어느새 인터뷰가 아니라 훈계를 하고 있었다.   

   저녁 촛불 순례 이후에 1시간 동안 작은 음악회가 열렸다. 
  사진작가이자 부천YMCA 사진클럽 '선용'을 지도하시는 윤명렬 선생님이 기타와 하모니카로 
주로 70년대의 향수어린 음악을 들려주어 20여명의 작은 청중이 같이 따라 불렀다. 부천Y 창립회원인 김명철 이사가 답가로 요들송 메들리 3곡을 하여 열띤 호응을 이끌어내기도 하였다. 마지막에는 다 함께 손을 잡고 '만남'을 불렀다.
  '생명과 평화의 공동체' 부천YMCA는 농성도 재미있게 한다.
   부천YMCA 회원, 실무자, 이사들은 금년 6월 말에 몽골 고비사막 여행을 하였는데, 동행한 윤명렬 선생님의 멋진 작품 하나를 소개한다. 
       


   부천시청에서 열렸던 사진전에서 사진 판매대금은 부천지역 몽골인을 위한 기금으로 쓴다고 한다.  

     이곳 저곳을 모기에 물려 가려워서 새벽 2시가 넘어 간신히 잠들었다가 새벽 4시 경 세차게 내리는 비에 놀라 깨었다. 텐트 아래에 물이 흥건히 흐르고 있었고, 텐트 틈새로 튀어드는 물 때문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도 쏟아지는 호우에도 무너지지 않는 텐트를 제공하여 주신 단체에 감사를 드린다.              

      교대시간을 2시간이나 앞둔 아침 7시에 호우주의보를 뚫고 윤병국 시의원이 찾아왔다.   오늘 단식 농성때문에 가슴 설레어 밤새 잠을 못이루다가 날이 밝자마자 찾아왔다고 한다. 
자발적으로 고생을 감수하고 나선 천심에 귀를 열어 정부도 허심탄회한 대화를 두려워하지    말았으면 한다.        

Posted by 벼리綱


 

           (사진 출처 : 부천매일 김정온 기자)

   부천지역 시민사회종교단체들이 지난 8월 20일부터 
   부천YMCA 김기현 사무총장을 시작으로
   정부의 4대강 막개발 공사 중단을 요구하는 릴레이 단식 농성에 들어갔습니다.
      
    4대강 공사는 대운하 공사의 변형이라는 의심을 받을 뿐만 아니라
   현재 공사 그 자체도 '살리기'가 아니라 '죽이기'로 진행되고 있습니다. 
   멀쩡한 1, 2급수가 흐르는 살아 있는 강에 10여미터나 되는 댐을 쌓고,
   물고기들의 쉼터이자 알을 낳는 강바닥을 준설하면 강이 살아 납니까?
   홍수나 가뭄 피해를 예방하려면 그러한 피해가 발생하는 지천을 정비할 일이지
   왜 멀쩡한 4대강에서 공사를 강행할까요?
   토건족의 금수강산 죽이기가 제발 그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부천지역 시민사회종교단체들은 이제 시민에게 호소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관심과 격려를 부탁드립니다. 
   단식 농성 장소는 부천 중앙공원 북쪽 중앙 부근(부천시청앞)입니다. 

     

  

   국제와이즈멘 부천클럽 회원들 중에서 다음 사람들이 참여합니다. 
  
   8월 26일(목) 저녁 7시 ~ 8월 27일 아침 9시 박종훈 증경회장 
   8월 28일(토) 아침 9시 ~ 8월 29일 아침 9시 김동섭 부회장
   9월 10일(금) 아침 9시 ~ 9월 11일 아침 9시 이강인 증경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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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들 하루 단식은 별거 아니라고 합니다만 저는 걱정이 앞섭니다.
   20여년도 훨씬 지난 전두환 집권기 시절, 보름 가량 단식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단식의 목표는 자랑스럽지 않은 일이지만 공소시효도 지났으니 ㅎㅎ 
  
   당시 저는 시대 상황 때문에 4학년이 되도록 학점 관리도 않하고 군입대, 대학원진학, 취직 어느 것도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저와 비슷한 처지에 있던 'ㄱ '이라는 친구가 어느 날 자랑스레 말하더군요.
   "몸무게 42kg으로 군 신체검사에서 면제되었다" 
   그 친구는 평소 몸무게가 48kg 가량 되었는데, 어떻게 살을 뺏는지 궁금했습니다.
   친구는 종로서적에 00 단식법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걸 보고 실천하면 하루에
   500g씩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 때 몸무게가 54kg 가량 나갔는데, 신체검사에서 대학생은 3급까지 현역인데,
   50kg ~ 55kg은 3급, 50kg 미만은 4급, 45kg 미만은 5급으로 면제였습니다. 
   10kg이나 뺄 자신도 없고, 면제까지는 생각치도 않았고, 방위로 복무하더라도 사회와 관계를 지속할 수 있기 때문에 7kg 정도 감량을 목표로 정했습니다. 
   단식법 책을 보니 예비단식, 본단식, 정리단식의 3단계로 되어 있어서 
   음식의 양을 줄이는 예비단식부터 시작하였는데, 시작부터 참 만만치 않더군요.   
   본단식은 더욱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특히, 김치 냄새의 유혹은 정말 못견디겠더군요.
   김치만 먹으려다가 밥까지 몇 숫가락 먹게 되고, 이런 일이 매일 두 어차례 반복되어
   결과적으로 음식을 먹지 않은 날은 하루도 없습니다. 
   그렇게 엉터리 단식을 했지만 신체검사하는 날 49kg은 간신히 달성했습니다.
   그런데, 검사관이 "50kg" 하고 말하면서 저더러 복창하라는 것입니다.
   제가 "눈금을 보세요. 49kg이잖아요"하고 항의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저는 눈물겨운 단식으로 3급을 받았지만, 당시 대학생 이상은 3급도 현역이었습니다. 
   대학원 진학으로 입영을 연기하고 대학원 수료 즈음에는 자원이 남아 3급이 방위로 
   바뀌면서 결국 단식은 하나마나가 되버렸습니다만....

   제정구 전 의원과 더불어 철거민 공동체를 이끌고 시흥 보금자리를 일군 정일우 신부님은 정기적으로 단식을 하시는데, 그만, 미네랄 등을 보충하지 않아 몸에 이상이 오고 말았다고
  합니다. 

   겨우 24시간 단식인데, 너무 엄살 떤다고 하실 분도 있겠지만 
   평생 하루 한 끼 굶어본 경험밖에 없으니 조금은 긴장이 됩니다.
   지금 저녁 6시인데, 벌써 배가 고파 죽겠습니다 ㅜㅜ    
        
    

Posted by 벼리綱
[7. 2.]
이제 몽골 여행의 막바지입니다.(여행기는 오늘로 끝입니다)
델리카는 어젯밤에 울란바토르에 도착하여 우리와 헤어졌습니다. 
기사는 버스 창문을 마구 두드리며 우리와 헤어지는 것을 안타까와 했습니다. 
 델리카 기사를 미워했던 제 자신이 좀 부끄러워지더군요. '조금 더 살갑게 대해줄 껄' 하는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그저께(허브향 진한 풀밭에서의 야영) 점심 무렵부터 핸드폰이 고장나서 사진을 찍지 못하였습니다. (나중에 귀국하여 충전해보니 고장이 아니라 방전이었습니다만) 
 사무실이나 집과 통화도 안되고, 메시지 수신도 안되었지만 UB에의 무사귀환에만 노심초사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고급 호텔에서 깨끗히 모래먼지를 씻어내고 옷도 갈아입고 나니 불현듯 집과 사무실 걱정이 몰려왔습니다. '아버님이 아프시지나 않을까' '소취하하는 건은 잘 마무리 되었을까'  '집에 가면 말없이 혼자 놀러갔다고 화내지는 않을까' (출국 며칠전 다툼 때문에 집에서 말을 서로 않고 있었습니다)

    

                              Photo by 정인조

                             몽골리아 호텔 앞을 흐르는 강입니다. 한국인에겐 평범해 보이겠지만 몽골 고비사막을 다녀온 우리에게는 낙원 같았습니다.    

  오전 10시경 버스기사는 10년밖에 안된 최신식(?) 현대 45인승 버스를 몰고 왔습니다.
  우리는 버스의 위용에 감탄하고 1명이 2자리를 차지하는 호사를 부렸습니다. 
  오늘은 시내 관광이고, 차량도 좋으니 아무 사고가 없으리라고들 생각하였습니다. but~

 UB 시내의 교통혼잡은 극심합니다. 
  조금만 틈이 있으면 마구 파고들어서 차량이 뒤엉키기 일쑤입니다. 
  더욱이, 체코제 낡은 버스는 능수능란하게 운전하고 수리하던 기사가 긴 버스는 주체를 못하여 좌우회전이나 후진을 하려면 한참 걸립니다. 그래서, 예정했던 자연사박물관도 구경 못하고 오늘 돌아다닌 곳도 몇 곳 안됩니다.    

  먼저, 몽골 정부, 국회, 우체국 등이 모여있는 [수흐바타르] 광장에 들렀습니다.
  이곳에는 한국 기업이 지은 멋진 백화점 건물도 있습니다. 다음 목적지로 출발하려고 모두 버스를 탔는데, 김영주 이사장님 일행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어딘가 화장실에 갔겠거니 하였는데, 20여분이나 지나 백화점에서 나오시는 겁니다. 그런데, 잘 걷지를 못하네요. 버스에서 내리다가 그만 발이 뒤집어졌다는 겁니다. 

   근처에 있다는 몽골 연세친선병원으로 찾아갔습니다. 연세친선병원은 연대의대와 울란바토르시가 50%씩 돈을 내서 1994년에 설립되었다고 합니다. 병원의 초대원장은 부천클럽의 촤타클럽인 제물포클럽의 전의철 증경회장입니다. 우리 일행 중 허상보 원장님도 세브란스 출신이시니 이국에서 고생하는 후배들 만날 생각에 더욱 좋아 하십니다.
  병원 건물도 멋지고 외래환자도 많아서 이곳에서 신뢰를 받고 있구나 싶었습니다.    
  마침 한국인 의사들이 없었습니다. 5천원 가량을 내고 엑스레이를 찍었습니다. 
  허원장님이 사진을 보고 뼈에는 이상이 없다면서 압박붕대나 간단한 부목으로 충분할 것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진출처(연대의대 동창회)   http://med-alumni.yonsei.ac.kr/publication/read.asp?no=423&num=50&number=423&vol=225-2005-7-19

   이러다보니 오전이 훌쩍 지나서 점심을 예약한 홍길동 식당(한국식)으로 갔습니다. 그랬더니 아뿔사... 그곳은 분점인데, 식사는 본점에 준비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곳에서 사람을 만나기로 한 박혜연 증경이사장님, 발을 다친 김영주 이사장님이 분점에 남기로 하였습니다.
허상보 원장님과 박종훈 원장님도 남아 김영주 이사장님을 치료하기로 하였습니다.
 김영주 이사장님은 부천의 저명한 외과의사와 한의사 두 분에게 양한방 협진을 받는 호사를 누린 것이죠.  

   우리는 서울거리에 있는 홍길동 식당 본점에서 일주일만에 맛있는 한국음식을 잔뜩 먹고나서, 몽골 전통공연을 보여주는 추키하우스로 갔습니다. 시간이 남아서 쇼핑을 하였는데, 저는 고급 캐시미어 상점으로 갔습니다. 마누라의 옷을 사려고 하는데, 유영자 선생이 쇼울을 강력히 권하여 15만원은 넘음직한 것을 69달러에 샀습니다. (나중에  마누라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유선생님 감사합니다) 

   추키하우스는 술과 음료를 마시는 테이블 주위에 있는 쇼파에서 공연을 구경하는 곳인데, 몽골 전통 공연이라지만 내용은 다소 빈약하였습니다. 다만 고음과 저음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던 것이 인상적인데, 가축을 부르면서 단련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몽골 사람들은 중국을 몹시 싫어하는데, 어키 말로는 "한국사람이 일본 싫어하는 것의 10배는 된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청나라의 지배를 받았고 내몽골(네이멍구)을 중국에 뺏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1921년 혁명 후에 쏘련의 영향권에 있으면서  그로 인한 피해도 무시 못합니다.  (바이칼호는 몽골어로 깊은 바다라는 뜻으로서 이곳 역시 원래 몽골 땅이었습니다) 
  쏘련은 몽골의 전통문자(위구르문자)를 말살하고 러시아문자를 이식하고, 몽골의 각종 전통을 말살하였습니다.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두 거인국 사이에 끼인 인구 300만도 안되는 넓지만 작은 나라의 슬픈 역사는 민족 내부 문제를 4대국(미일중러)에 의존하는 우리 모습과 조금도 다르게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저녁에는 김기현 총장이 출국전에 미리 알아둔 인도 식당 하자라에서 호화로운 식사를 하였습니다. 세계의 유명인들이 몽골을 방문하면 꼭 들르는 곳이라는군요.
    그곳에 [몽골, 바람에서 길을 찾다]의 저자 한성호씨를 만나 몽골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성호씨는 삶의 의미를 찾아 인도에서 한 1년을 살았지만 찾지 못하였고,
    우연히 몽골에 와서 자연과 어우러져 사는 유목민들의 삶에 매료되어 7년째 살고 있답니다. 몽골 여자와 결혼하였고, 앞으로 몽골땅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라고 합니다. 
   
    한성호씨가 하루는 게르를 방문하여 나이 많은 유목민 노인에게 "이렇게 사는게 행복하세요?"하고 물었더니 "행복이 뭔대요?"하고 되묻더라는 것입니다.
   며칠간의 남고비 여행에서 나타나듯이 유목민들은 문명의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물과 식량이 귀하고, 최소한의 의식주만 누리며 온갖 자연재해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삶에서 주어지는 온갖 어려움(지난 겨울 조드 - 한해-로 유목민의 가축이 절반이나 죽었다죠)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죽음도 자연스레 받아들여 봉분마저 만들지 않는 유목민들에게는 애시당초 불행이란 없으니 행복도 따로 없는 것이겠지요.       

   시장의 논리가 강요되지 않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곳, 행복을 찾아 헤매지 않는 삶!     
   한성호씨는 몽골 유목민에게서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는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루 종일 푸른 하늘과 끝없는 대지를 바라보며 사는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을까요?
   바로 하늘과 땅이 있을 뿐이고 탐욕이나 거짓이 자리할 곳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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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비사막은 인간에게 오염되지 않은 자연의 순수함과 위대함을 가장 잘 보여줍니다. 
   짙푸른 하늘과 아침, 저녁의 오색 영롱한 햇살, 밤하늘의 별무리들..
   한없이 펼쳐진 황톳빛 초원과 먼먼 지평선, 거대한 모래 언덕, 모래에 깎인 바위들..
  
   고비사막은 방문객에게 엄청난 인고를 요구합니다. 
   뜨거운 햇살, 잦은 차량 고장, 귀하디 귀한 물, 자칫하면 굶기 일쑤...
   고비사막을 방문하려면 자연에 순응하여 사는 유목민이 되어야 합니다.

   고비사막에서는 인정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떠한 곤경에 처했더라도 한 두 시간이면 반드시 누군가 나타나 도와줍니다.
   그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던 것처럼... 
    
     tip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의 여행은 즐거움이 배가되고 고통이 반감된다!

  - 끝 -     

              


Posted by 벼리綱